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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스타 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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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화이트 스타 라인은 1845년 영국 리버풀에서 설립된 해운 회사로, 초기에는 영국과 오스트레일리아 간 무역에 집중했다. 1867년 파산 이후 토마스 이즈메이에게 인수되어 대서양 횡단 노선에 진출, 오셔닉 스팀 네비게이션 컴퍼니로 재편되었다. 1870년대에는 대서양 횡단 서비스에서 블루 리본을 획득하며 명성을 얻었지만, 1873년 아틀란틱호 침몰 사고와 같은 불운을 겪기도 했다. 이후 속도 경쟁에서 벗어나 안락함을 추구하며, 올림픽급 여객선 등을 건조했으나, 타이타닉호 침몰, 제1차 세계 대전, 대공황 등을 거치며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다. 1934년 큐나드 라인과 합병되어 커나드-화이트 스타 라인이 되었고, 1949년 큐나드 라인에 완전히 흡수되면서 화이트 스타 라인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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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스타 라인 - [회사]에 관한 문서
회사 정보
화이트 스타 라인 로고
로고
회사 종류합자회사
설립일1845년
설립 장소리버풀, 잉글랜드
해산일1934년
서비스 지역대서양,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산업 분야해운, 운송
후신큐나드-화이트 스타 라인
모회사이스메이, 임리 앤드 컴퍼니
주요 선박
기타
화이트 스타 라인 깃발
사기 (House Flag)

2. 역사

화이트 스타 라인은 1845년 영국 리버풀에서 존 필킹턴과 헨리 윌슨에 의해 설립되어, 영국과 오스트레일리아 간 무역에 주력했다.[2][3] 1851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금이 발견되면서 회사는 크게 성장했다.[4] 초기에는 용선한 범선들을 운항했으나, 1854년 가장 큰 배였던 테일러 호가 침몰하는 사고를 겪기도 했다.[5][6][7][8]

이후 자체적으로 범선을 주문하여 성공을 거두었고, 빅토리아로 가는 항로도 운영했다.[9][10][11] 1863년에는 첫 증기선인 로열 스탠다드 호를 도입했다.[16][17] 1864년 다른 두 회사와 합병했으나, 1867년 파산했다.[18][20]

토마스 이즈메이


1868년, 토마스 이즈메이가 파산한 회사를 인수하여 리버풀과 뉴욕 간 북대서양 항로에 대형 증기선을 운항하는 새로운 회사로 재탄생시켰다.[21][22][23] 이즈메이는 할랜드 앤드 울프 조선소와 협력 관계를 맺고, 1870년 윌리엄 임리를 경영진에 합류시켰다.[24][25][26]

1870년 건조된 오셔닉 호 (3,707 GRT)


1871년 건조된 아드리아틱 호 (3,888 GRT)


1871년부터 ''오셔닉''급 여객선을 도입하여 북대서양 항로를 운항하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기술적인 문제와 콜린스 라인과의 이름 혼동 문제도 있었지만, 곧 성공을 거두었다.[31] 1872년에는 아드리아틱호가 블루 리본을 획득하며 속도 경쟁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32]

1873년 아틀란틱호 침몰 사고로 큰 피해를 입었지만,[37][38] 이후 브리타니아호와 저마닉호 등 새로운 증기선을 도입하며 성장을 이어갔다.[44] 1880년대에는 태평양과 뉴질랜드 항로에도 진출했다.[47][52] 1890년대 후반부터는 속도 경쟁보다는 안락함에 초점을 맞추는 전략으로 변화를 시도했다.[73]

1910년 건조된 올림픽호 (45,324 GRT)


예인선과 함께 시험 항해 중인 타이타닉


1899년 토마스 이즈메이가 사망하고 아들 J. 브루스 이즈메이가 경영권을 이어받았다.[79] 1900년대에는 '빅 포(Big Four)'로 불리는 대형 여객선들을 건조하여 크기와 쾌적함을 중시하는 새로운 트렌드를 이끌었다.[89][90] 1902년 존 피어폰트 모건의 국제 해상 회사(IMM)에 인수되었지만,[94] 1907년 올림픽급 여객선 건조를 시작하며 독자적인 노선을 이어갔다.[100]

1912년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는 회사에 큰 타격을 주었지만,[106] 브리타닉호 건조를 통해 안전성을 강화하고,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선박들이 징발되어 활약했다.[104][107][108]

전후에는 전쟁 배상으로 받은 독일 여객선들을 투입하여 운항을 재개했지만,[129][130] 1920년대 후반 카일산트 남작에게 인수되면서 재정난을 겪게 되었다.[138][139] 대공황의 여파로 경영난이 심화되자, 1934년 큐나드 라인과 합병하여 커나드-화이트 스타 주식회사(Cunard-White Star Limited)를 설립했다.[153][154]

1947년 큐나드 라인이 커나드-화이트 스타 라인의 잔여 지분을 인수하면서 화이트 스타 라인은 사실상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151] 1950년 큐나드 라인으로 완전히 통합되었고, 1960년대까지 마지막 화이트 스타 라인 여객선들이 운항하다 퇴역하면서 화이트 스타 라인의 흔적은 완전히 사라졌다.[157][158][159]

2. 1. 초기 역사 (1845–1868)

테일러 호의 침몰은 회사가 경험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최초의 "화이트 스타 라인(White Star Line)"이라는 이름을 가진 회사는 1845년 존 필킹턴(John Pilkington)과 헨리 윌슨(Henry Wilson)에 의해 영국 리버풀에서 설립되었다.[2][3] 이 회사는 영국-오스트레일리아 무역에 집중했는데, 1851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금이 발견됨에 따라 이 무역은 증가했다. 금광 발견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오스트레일리아로 이주하기를 원했고, 오스트레일리아의 인구는 3년 만에 43만 명에서 170만 명으로 증가했다. 이때부터 필킹턴과 윌슨은 언론에 대응할 때 선박의 안전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소박한 목조 범선에서 항해를 더 즐겁게 하기 위해, 승객들이 인기 있는 곡에 맞춰 춤을 출 수 있도록 음악가 그룹이 고용되었다.[4] 이 무역에서 속도와 크기는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 함대는 처음에 용선된 범선 테일러(Tayleur) 호, 블루 재킷(Blue Jacket) 호, 화이트 스타(White Star) 호, 레드 재킷(Red Jacket) 호, 엘렌(Ellen) 호, 벤 네비스(Ben Nevis) 호, 엠마(Emma) 호, 머메이드(Mermaid) 호 그리고 아이오와(Iowa) 호로 구성되었다. 당시 최대 규모의 선박이었던 테일러(Tayleur) 호에 큰 기대가 걸려 있었다.[5] 하지만 이러한 기대는 곧 무너졌다. 1854년 1월 19일 첫 항해를 시작한 테일러(Tayleur) 호는 조종이 어렵고 승무원의 경험이 부족했다.[6] 아일랜드 근처 람베이 섬(Lambay Island)에서 매우 거친 바다에서 암초에 부딪히자 배가 침몰했고, 탑승자 650명 중 290명만 생존했다. 그 후의 조사 결과, 선박을 운항할 때 필요한 안전 예방 조치를 취하지 않은 소유주인 찰스 무어 앤드 컴퍼니(Charles Moore & Co.)에게 책임이 있다고 판명되었다. 이로써 화이트 스타 라인과 선장은 어떠한 비난도 면하게 되었다.[7][8]

테일러(Tayleur) 호의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회사는 자체적으로 여러 범선을 주문했는데, 그중 첫 번째가 레드 재킷(Red Jacket) 호였다. 이 배는 오스트레일리아 항로에서 충분히 효율적인 것으로 판명되어 회사의 성공을 보장했으며, 샬리마르(Shalimar) 호, 술타나(Sultana) 호, 엠마(Emma) 호, 화이트 스타(White Star) 호와 같은 새롭고 빠른 선박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9] 또한, 회사는 리버풀에서 빅토리아로 가는 항해도 운영했는데, 이를 웨일스 신문에서 클론다이크 골드러시의 관문으로 홍보했다.[10][11] 이 항로의 선박 중 하나가 실리스트리아(Silistria) 호였다. 케이프혼을 돌고 발파라이소샌프란시스코에 정차한 후, 4개월간의 항해 끝에 빅토리아에 도착했다.

그러나 1856년 회사는 우편 계약을 잃었고, 윌슨은 여전히 대중의 관심을 유지하기 위해 더 큰 배를 원했다. 의심스러웠던 필킹턴은 회사를 떠났다.[12] 윌슨은 그를 매형인 제임스 체임버스(James Chambers)로 대체했고,[13] 회사는 범선에 모든 것을 걸고 사업을 계속했는데, 가장 직접적인 경쟁자인 블랙 볼 라인(Black Ball Line)과 이글 라인(Eagle Line)은 증기선을 이용한 서비스 설립으로 인한 어려움 끝에 1858년 합병했다.[14] 이 기간 동안 윌슨은 이민자의 흐름에 주목하여 추세에 따라 캐나다 또는 뉴질랜드로 서비스를 제공했다.[15] 1863년, 회사는 첫 번째 증기선인 로열 스탠다드(Royal Standard) 호를 취득했다.[16][17]

원래의 화이트 스타 라인은 1864년 블랙 볼 라인(Black Ball Line)과 이글 라인(Eagle Line)과 같은 다른 두 개의 소규모 라인과 합병하여 리버풀, 멜버른 및 오리엔탈 스팀 네비게이션 컴퍼니 리미티드(Liverpool, Melbourne and Oriental Steam Navigation Company Limited)라는 대기업을 형성했다.[18] 한편, 윌슨의 지휘 아래 회사는 두 번째 증기선인 시리우스(Sirius) 호를 포함한 신규 건설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많은 돈을 빌렸다. 걱정된 체임버스는 회사를 떠났고 존 커닝햄(John Cunningham)으로 대체되었지만 사업은 호전되지 않았다. 시리우스(Sirius) 호는 취역하기 전에 매각되어야 했다.[19] 합병은 성공하지 못했고 화이트 스타는 리버풀-뉴욕 노선에 집중하기 위해 분리되었다. 신규 선박에 대한 대규모 투자는 차입으로 이루어졌지만, 회사의 은행인 리버풀 왕립은행(Royal Bank of Liverpool)이 1867년 10월 파산했다. 화이트 스타는 52만 7천 파운드(약 5.72억파운드)의 엄청난 부채를 떠안게 되었고 파산을 선고받았다.[18][20]

1868년 1월 18일, 내셔널 라인(National Line)의 이사였던 토마스 이즈메이(Thomas Ismay)는 파산한 회사의 회사기, 상표명, 영업권을 1,000파운드(약 1000GBP)에 매입했다.[21][22] 그의 목표는 리버풀과 뉴욕 간 북대서양 항로에 대형 증기선을 운항하는 것이었다.[23] 이즈메이는 회사 본사를 리버풀의 알비온 하우스(Albion House, Liverpool)에 설립했다. 이즈메이는 당구 게임 중 리버풀의 저명한 상인 구스타프 크리스티안 슈바베(Gustav Christian Schwabe)와 그의 조카이자 조선업자인 구스타프 빌헬름 볼프(Gustav Wilhelm Wolff)를 만났다. 슈바베는 이즈메이가 볼프의 회사인 할랜드 앤 볼프(Harland and Wolff)에서 배를 건조하는 조건으로 새로운 항로에 자금을 지원하겠다고 제안했다.[24] 이즈메이는 이에 동의했고, 할랜드 앤 볼프와의 파트너십이 수립되었다. 조선업체는 1869년 7월 30일에 첫 주문을 받았다. 할랜드 앤 볼프는 원가에 고정 비율을 더한 가격으로 선박을 건조하고 화이트 스타 라인의 경쟁사에는 선박을 건조하지 않기로 합의했다.[25] 1870년에는 윌리엄 임리(William Imrie)가 경영진에 합류했다.[26]

2. 2. 오셔닉 스팀 네비게이션 컴퍼니 (1868–1874)



1868년 1월 18일, 내셔널 라인(National Line)의 이사였던 토마스 이즈메이(Thomas Ismay)는 파산한 회사의 회사기, 상표명, 영업권을 1,000파운드에 매입했다.[21][22] 그의 목표는 리버풀과 뉴욕 간 북대서양 항로에 대형 증기선을 운항하는 것이었다.[23] 이즈메이는 회사 본사를 리버풀의 알비온 하우스(Albion House, Liverpool)에 설립했다.

이즈메이는 당구 게임 중 리버풀의 저명한 상인 구스타프 크리스티안 슈바베(Gustav Christian Schwabe)와 그의 조카이자 조선업자인 구스타프 빌헬름 볼프(Gustav Wilhelm Wolff)를 만났다. 슈바베는 이즈메이가 볼프의 회사인 할랜드 앤드 울프(Harland and Wolff)에서 배를 건조하는 조건으로 새로운 항로에 자금을 지원하겠다고 제안했다.[24] 이즈메이는 이에 동의했고, 할랜드 앤드 울프와의 파트너십이 수립되었다. 조선업체는 1869년 7월 30일에 첫 주문을 받았다. 할랜드 앤드 울프는 원가에 고정 비율을 더한 가격으로 선박을 건조하고 화이트 스타 라인의 경쟁사에는 선박을 건조하지 않기로 합의했다.[25] 1870년에는 윌리엄 임리(William Imrie)가 경영진에 합류했다.[26]

첫 번째 선박이 취역 준비를 하는 동안 이즈메이는 40만 파운드의 자본금으로, 1,000파운드짜리 주식으로 나뉘어 화이트 스타 라인을 설립했다.[27] 회사는 이즈메이, 임리 앤 컴퍼니(Ismay, Imrie and Company)라는 새로운 회사가 관리했다. 이 복잡한 조직에도 불구하고, 해운 회사는 존재하는 동안 공개적으로 화이트 스타 라인으로 알려졌다.[26]

회사가 출범했을 때 이즈메이가 어떤 항로를 장악할 것으로 예상했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1870년에는 리버풀과 뉴욕 간 항로에 큐나드 라인(Cunard Line), 귀언 라인(Guion Line), 인먼 라인(Inman Line), 그리고 이즈메이가 한때 주주였던 보다 작은 규모의 내셔널 라인(National Line) 등 4개의 회사가 확고히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할랜드 앤드 울프에 주문한 선박의 특징은 이즈메이가 처음부터 북대서양을 목표로 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경향이 있었다.[28]

2. 3. 첫 대서양 횡단 서비스 (1868–1874)



화이트 스타 라인은 리버풀뉴욕 간 북대서양 항로를 운항하기 위해 ''오셔닉''급으로 알려진 거의 동일한 6척의 선박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오셔닉 (1870), 애틀랜틱, 발틱 (1871), 리퍼블릭 (1872)에 이어 약간 더 큰 셀틱 (1872)과 아드리아틱 (1871)이 뒤따랐다.[29] 많은 해운 회사들이 선박 이름에 공통된 주제를 사용하는 것이 오랫동안 관례였고, 화이트 스타 라인은 선박 이름에 '-ic'으로 끝나는 이름을 붙였다. 또한 회사는 선박의 구별되는 특징으로 검은색 상단이 있는 황갈색 연돌과 독특한 선박기, 즉 흰색 5각형 별이 있는 삼각형 모양의 빨간색 삼각기를 채택했다.

이 최초의 여객선대에 대한 초기 설계에서 각 선박은 길이 약 128.02m, 너비 약 12.19m였고, 약 의 총톤수를 가지며, 단일 프로펠러를 구동하는 복합 확장 엔진을 갖추고 최대 의 속도를 낼 수 있었다. 또한 2등급 시스템을 기반으로 한 승객 숙박 시설도 동일했는데, 당시 '살롱석(Saloon Class)'이라고 불렸던 166명의 1등석 승객과 1,000명의 3등석 승객을 위한 숙박 시설을 제공했다.[30] 화이트 스타 라인은 유럽에서 북미로 흘러드는 대규모 이민자 물결 속에서 존경받는 회사가 되는 것을 목표로 했으며, 회사 역사 전반에 걸쳐 다른 해운 회사보다 훨씬 많은 3등석 승객을 위한 통행을 제공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했다. ''오셔닉''급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발전 중 하나는 선박의 양쪽 끝에 3등석을 나누어 배치한 것이었다. 독신 남성은 선미에, 독신 여성과 가족은 선미에 숙소를 배정했고, 이후에는 기혼 부부도 선미에 숙소를 배정할 수 있도록 개선되었다.[30]

1871년 봄, 화이트 스타 라인이 대서양 횡단 여객 시장에 진출한 것은 순탄치 않았다. ''오셔닉''호가 3월 2일 첫 항해를 시작했을 때, 리버풀을 출발하여 승객 64명만을 태웠고, 뉴욕으로 향하기 전에 다음 날 더 많은 승객을 태우기 위해 퀸스타운에 기항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웨일스 해안을 벗어나기 전에 홀리헤드 근처에서 베어링이 과열되어 수리하기 위해 돌아와야 했다. 3월 17일에 항해를 재개하여 3월 28일에야 뉴욕에 도착했다. 그러나 뉴욕에 도착하자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4월 15일 리버풀로 돌아가는 항해를 시작할 무렵, 약 50,000명의 관중이 배를 구경했다. 화이트 스타 라인의 첫 번째 배와 관련된 문제는 짧았고 ''Oceanic''의 두 번째 뉴욕 항해는 더 성공적이었습니다. 5월 11일 리버풀을 출발하여 5월 23일 승객 407명을 태우고 뉴욕에 도착했다.[31]

그 후 18개월 동안 나머지 5척의 배가 완성되었고, 하나씩 북대서양 항로에 합류했다. ''애틀랜틱''호는 6월 8일 리버풀에서 첫 항해를 아무런 사고 없이 시작했다. 그러나 그해 여름, 회사의 여론에 위협이 될 수 있는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6척의 선박 중 이 등급의 3번째와 6번째 선박에 처음 선택된 이름은 ''퍼시픽''과 ''아틱''이었는데, 언론에 보도될 때 문을 닫은 콜린스 라인에 속했던 같은 이름의 두 척의 선박에 대한 언급과 함께 나왔는데, 두 척 모두 바다에서 침몰하여 많은 인명 피해를 입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외륜선이었던 이 두 선박의 경우, 아틱은 1854년 9월 다른 배와 충돌한 후 뉴펀들랜드 해안에서 침몰하여 300명 이상의 목숨을 잃었고, 퍼시픽 (1849)은 1856년 1월 승객 186명과 함께 실종되었다.

결과적으로 화이트 스타 라인은 이 두 선박의 이름을 변경하기로 했다. 1871년 3월 8일 ''퍼시픽''으로 진수된 3번째 선박은 완성되기 전에 ''발틱''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헐랜드 앤 울프에서 건조가 막 시작된 6번째 선박의 룡골은 거치되기 전에 ''아틱''으로 명명되었지만 ''셀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오셔닉''급 4번째 선박인 ''리퍼블릭''호는 1872년 2월 1일 첫 항해를 시작했고, 그 무렵 건조 중인 마지막 두 척의 선박에 대한 개조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설계 변경에 따라 선체 길이가 약 5.18m 연장되어 톤수도 증가했다. ''아드리아틱''호는 1872년 4월 11일에 취역했고, ''셀틱''호는 6개월 후인 10월 24일에 취역했다. 이 배들은 주목할 만한 성공을 거두며 시작했다. ''아드리아틱''호는 취역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평균 속도 로 7일 23시간 17분 만에 서쪽으로 기록적인 항해를 완료하여 최초로 화이트 스타 라인 선박으로 블루 리본을 획득했다.[32] 1873년 1월, ''발틱''호는 평균 속도 로 리버풀로 돌아오는 항해를 7일 20시간 9분 만에 완료하여 동쪽으로 블루 리본을 획득한 최초의 화이트 스타 라인 선박이 되었다.[33]

2. 4. 1874~1899년

1873년 3월 31일, 아틀란틱호가 핼리팩스 근해에서 침몰하여 535명의 목숨을 잃는 큰 사고가 발생했다.[37] 리버풀에서 뉴욕으로 가던 중 거친 폭풍을 만나 석탄 부족을 우려하여 핼리팩스 항으로 가려다 암초에 부딪혀 침몰했다.[38] 이 사고로 화이트 스타 라인은 선박에 충분한 석탄을 공급하지 않았다는 비난을 받았지만, 조사 결과 선원들의 항해 실수로 밝혀졌다.[39][40] 회사는 희생자 묘지 관리 비용을 지원하고 기념비를 건립했다.[41]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화이트 스타 라인은 계속 성장했다. 1874년에는 브리타니아호와 저마닉호라는 두 척의 새로운 증기선을 도입했다.[44] 이 배들은 블루 리본을 여러 차례 획득하며 빠른 속도를 자랑했다.[45] 또한, 회사는 커나드 라인과 우편 계약을 체결하여 선박 이름 앞에 'RMS'(왕립우편선)를 붙일 수 있게 되었다.[46]

1880년대, 화이트 스타 라인은 (Occidental and Oriental Steamship Company)와 협력하여 태평양 항로에 진출했다.[47] (Occidental and Oriental Steamship Company)는 1908년에 사라졌다.[51] 1882년에는 (Shaw, Savill & Albion Line)과 공동으로 뉴질랜드 항로를 개척했다.[52]

1888년부터는 살아있는 소를 운송하는 화물선을 도입하기 시작했다.[55] 하지만 1890년대에 루닉(Runic)호의 자매선이 첫 항해 후 1년도 채 되지 않아 승무원 전원과 함께 수수께끼처럼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했다.[57][58]

1890년대 후반, 화이트 스타 라인은 속도 경쟁에서 벗어나 안락함에 초점을 맞추는 전략으로 변화를 시도했다. 1897년 건조된 호는 이러한 변화를 보여주는 첫 번째 선박이었다.[73]

2. 5. 1899~1914년

1899년 1월 14일, 토마스 이즈메이가 추진한 오셔닉호가 진수되었다. 이 배는 19세기에 진수된 마지막 영국 대서양 횡단 여객선이자, 길이에서 그레이트 이스턴호를 능가한 최초의 선박이었다. 약 214.58m 길이, 약 20.73m 너비, 총톤수 17,274톤으로, 노르트 도이치 로이드의 카이저 빌헬름 데어 그로세호보다 42% 더 컸다. 의 속력을 낼 수 있었으며, 1,700명이 넘는 승객을 수용할 수 있었다.[78][79][80]

''오셔닉''호는 1899년 9월 6일 리버풀에서 첫 항해를 시작했다. 그러나 토마스 이즈메이는 이 배의 성공을 보지 못하고 1899년 11월 23일 6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회사의 경영권은 아들 J. 브루스 이즈메이에게 넘어갔다.[79]

토마스 이즈메이의 사망에도 불구하고, 화이트 스타 라인은 계속 성장했다. 1901년에는 켈틱호, 1902년에는 세드릭호, 1904년에는 발틱호, 1906년에는 아드리아틱호가 건조되었다. 이 네 척의 여객선은 '빅 포(Big Four)'로 불리며, 속도 경쟁보다는 크기와 쾌적함을 중시하는 새로운 트렌드를 이끌었다.[89][90] 특히 ''아드리아틱''호는 선내에 터키식 목욕탕과 수영장을 갖춘 최초의 여객선이었다.[75]

| 선박 이름 | 진수 연도 | 총톤수 | 길이 | 특징 |

| :-------------------------------------------------------------- | :-------- | :------- | :------------ | :---------------------------------------------------------------------------------------------------------------------------------------------------------------------------------------------------------------------------------------------------------------------- |

| 오셔닉 | 1899년 | 17,274톤 | 약 214.58m | 19세기에 진수된 마지막 영국 대서양 횡단 여객선, 길이에서 ''그레이트 이스턴''호를 능가한 최초의 선박.[78][79] |

| 켈틱 | 1901년 | 21,035톤 | 약 213.36m | ''그레이트 이스턴''호의 톤수를 초과한 최초의 선박.[75] |

| 세드릭 | 1902년 | 21,073톤 | 약 213.36m | 켈틱호와 유사하지만, 더 많은 개인 욕실과 응접실이 있는 연결된 객실로 구성된 스위트룸이 더 많았다.[75] |

| 발틱 | 1904년 | 23,876톤 | 약 221.28m | 건조 과정에서 길이가 28피트 연장됨.[40] |

| 아드리아틱 | 1906년 | 24,541톤 | 약 222.20m | 선내에 터키식 목욕탕과 수영장을 갖춘 최초의 여객선.[75] ''더 바이 스탠더''는 '호화로운 여객선'이라고 평가했다. |

1902년, 화이트 스타 라인은 미국 은행가 존 피어폰트 모건의 국제 해상 회사(IMM)에 인수되었다.[94] J. 브루스 이즈메이는 IMM의 회장직을 맡게 되었다.[97]

2. 6. 올림픽급 여객선



1907년, 벨파스트의 조선소인 해랜드 앤 울프(Harland and Wolff)의 회장 피어스 경(Lord Pirrie)은 화이트 스타 라인(White Star Line)의 사장 J. 브루스 이즈메이(J. Bruce Ismay)에게 3척의 거대한 여객선 건조 계획을 제안했다. 이는 당시 취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큐나드 라인(Cunard Line)의 호화 고속 여객선 루시타니아호와 그 자매선 모리타니아호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렇게 건조된 것이 올림픽호, 타이타닉호, 브리타닉호이다(이 3척을 통틀어 올림픽급 여객선이라고 불렀다).[100]

화이트 스타 라인은 1907년 리버풀에서 사우샘프턴으로 고속 서비스를 이전하여 셰르부르에서 대륙을 경유하는 이점을 확보함으로써 더 많은 승객을 태울 수 있게 되었다. 이 서비스는 처음에 토이토닉호, 마제스틱호, 오셔닉호, 아드리아틱호가 담당했는데, ''아드리아틱''호는 속도는 느렸지만 더 많은 승객을 수송할 수 있었다. 프랑스 경유 중 승객과 수하물 탑승을 돕기 위해 페리도 구입했다. 그러나 이 해결책은 임시방편일 뿐이었고, 회사는 이미 더 크고 빠른 선박을 도입하여 정기적이고 효율적인 서비스를 구축할 계획이었다.

할랜드 앤 울프가 새로운 올림픽급 여객선의 건조를 시작했을 때, 화이트 스타 라인은 계속해서 사업을 다각화했다. 사우샘프턴에 정착하면서 회사 간 가격 경쟁이 발생하여 3등석 요금이 급격히 인하되었다. 이 시점에 수요에 따라 요금과 항해를 규제하기 위해 북대서양 협회가 설립되었다.[97] 1909년 화이트 스타 라인은 캐나다를 운항하는 또 다른 IMM 계열사인 도미니언 라인의 사업 일부를 인수했다. 당시 건조 중이던 이 회사의 두 척의 선박이 화이트 스타 라인으로 이관되어 로렌틱호와 메간틱호가 되었고, 회사는 캐나다 노선에 진출하게 되었다. 이 두 척의 선박은 올림픽급 여객선의 추진 방식을 시험하는 장소이기도 했다.[102]

1911년 6월 취항한 올림픽호는 즉각적이고 매우 만족스러운 성공을 거두었고,[103] 화이트 스타 라인은 세 번째 선박인 브리타닉호를 주문했다.[104] 그러나 초기 성공은 곧 중단되었다. 1911년 9월 20일, ''올림픽''호는 순양함 호크호와 충돌하여 손상을 입었고, 장기간 수리에 들어가면서 ''타이타닉''호의 취항이 연기되었다.[105]

타이타닉호는 결국 1912년 4월 취항했지만, 그 운항은 짧았다. 처녀 항해 중 빙산과 충돌하여 침몰(타이타닉 호 침몰)하여 약 1,500명이 사망했다. 여론에 미친 영향은 상당했다.

''타이타닉''호의 침몰은 대형 여객선에 대한 신뢰를 약간 떨어뜨렸고, 추가적인 구명정을 갖추어야 했다. ''올림픽''호는 침몰 직후, 일부 화부들이 서둘러 설치된 접이식 구명정의 해상성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고 일을 거부하면서 반란이 일어났다. 이 배는 1912년 10월 운항이 중단되었고, ''타이타닉''호 사건을 계기로 안전성을 크게 개선하기 위해 대대적인 개조를 거쳤다. 그리고 1913년 3월 운항을 재개했다.[106] 자매선의 침몰에서 얻은 교훈을 설계에 반영하기 위해 ''브리타닉''호의 건조는 연기되었다.[107]

2. 7. 제1차 세계 대전과 전후 복구 (1914–1926)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화이트 스타 라인의 선박들은 영국 해군에 징발되거나 선박 징발법에 따라 운용되었다.[108] 사우샘프턴 항로는 중단되었고, 리버풀-뉴욕 항로에는 ''발틱''과 ''아드리아틱''만 남았다가, 이후 레드 스타 라인에서 빌린 , , 가 합류했다.[109]

''오션닉'', ''튜토닉'', ''켈틱'', ''세드릭''은 보조 순양함으로 개조되어 영국 해군 제10전대에 합류했다. ''마제스틱''은 전쟁 발발 몇 주 전 해체 작업이 시작되어 전투를 피했다.[110] 전시 첫 손실은 1914년 9월 좌초된 ''오션닉''이었다.[111]

1915년 8월에는 ''아라빅''이 어뢰 공격을 받아 44명이 사망했다.[112] 1916년 11월에는 병원선으로 운용되던 가 케아 근해에서 기뢰를 밟아 침몰했다. ''브리타닉''의 침몰은 화이트 스타 라인에게 가장 큰 손실이었으며, 전쟁 중 U보트 공격으로 침몰한 가장 큰 선박이었다. 1916년에는 [113][114]도 잃었다.

1917년 1월, 가 침몰하여 354명의 사망자와 3,211개의 금괴를 잃었다.[115] 그 다음 달에는 가, 8월에는 가 침몰했다.[116] 1918년에는 가 어뢰 공격을 받아 침몰했다.[117]

많은 화이트 스타 라인 선박들이 수송선으로 징발되었는데, ''올림픽''은 20만 명이 넘는 병력을 수송했다.[118] 전쟁 중 건조 중이던 ''벨직''(Belgic)과 는 미완성 상태로 군사 목적으로 사용되었다.[119] 화이트 스타 라인은 전쟁 기간 동안 10척의 선박을 잃었지만, 거의 55만 명의 군인과 4백만 톤의 화물을 수송했으며, 325명이 넘는 장교, 기술자, 헌병, 의료진이 훈장을 받았다.[120]

전쟁이 끝나자 살아남은 선박들은 상업 운항을 재개했다.[120] 1920년에는 ''올림픽''이 정비를 거쳐 운항에 복귀했는데, 석탄 대신 기름 연료를 사용하도록 전환되었다.[124]

회사는 손실을 보상하기 위해 중고 선박을 구입하거나, IMM 내 다른 해운 회사에 선박을 대여했다.[125] 와 ,[126] ,[127] ''폴랜드''를 인수했다.[128]

1922년, 화이트 스타 라인은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전쟁 배상으로 할양된 3척의 전 독일 여객선을 확보했다.[129] 이들은 (전 SS ''비스마르크''), (전 SS ''베를린''), (전 SS ''콜럼버스'')였다.[130] 56,551GRT급의 ''마제스틱''은 당시 세계 최대의 여객선이었으며, 회사의 기함이 되었다. 두 척의 전 독일 여객선은 ''올림픽''과 함께 사우스햄튼-뉴욕 노선에서 성공적으로 운항되었다.[131]

전쟁 직후 대서양 이민자 무역은 붐을 이루었지만,[132] 1924년 이민법(Immigration Act of 1924)으로 인해 이민자 수가 제한되면서 타격을 입었다.[133] 관광의 증가는 이민자 무역 감소를 어느 정도 상쇄했으며, 화이트 스타 라인은 여객선을 개조하고 3등석 객실을 관광석으로 재구성하여 새로운 여행객에게 어필했다.[134][135]

2. 8. IMM 탈퇴와 카일산트 남작 시대 (1927–1934)

1926년 11월, 카일산트 남작은 7907661GBP에 화이트 스타 라인의 모든 주식을 매입했다.[138] 이 매각은 1927년 1월 1일에 발효되었으며, 그의 로열 메일 스팀 패킷 컴퍼니(RMSPC) 덕분에 카일산트는 세계 최대의 선단을 소유하게 되었다.[139] 그러나 카일산트의 제국은 성공하지 못했다. 회사가 심각한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던 시기에 그의 광대하고 노후한 선대는 교체되어야 했다. 이는 주로 만기가 임박한 재무부 대출금 상환과 관련이 있었다.[140]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일산트는 새로운 인수를 이용하여 선대를 재편성했다. 그는 화이트 스타에 그룹 내 사우샘프턴 항로의 독점권을 부여하기로 결정하고, 따라서 로열 메일이 이 항로에서 운영하던 두 척의 배인 ''오하이오''호와 ''오르카''호를 재배치하여 각각 와 로 이름을 바꾸고 와 함께 캐나다 항로에 투입했다.[141] 회사의 새 회장으로서 카일산트는 호주 노선에서의 회사 강화에도 힘썼다. 이를 위해 그는 1928년 존 엘러먼 경이 소유한 쇼, 새빌 앤 알비온 라인(Shaw, Savill & Albion Line)의 소수 주식을 994000GBP에 사들였다. 이 조치는 거의 200만파운드에 코먼웰스 라인(Commonwealth Line)을 인수한 데 이어 이루어졌다. 카일산트가 설립한 화이트 스타 라인 유한회사(White Star Line Ltd)가 한 이러한 인수는 재무부에 대한 상환 연기를 요구하던 중에도 회사를 파산으로 몰아넣었다.[142]

1928년, 새로운 가 주문되었고, 그 해 하랜드 앤 울프에서 기공되었다. 길이 1000피트에 달하는 이 대형 여객선은 새로운 디젤 전기 추진 시스템으로 추진되는 모터선이 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키를 놓는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1929년 새로운 추진 장치 연구를 위해 공사가 중단되었다. 건설은 결코 재개되지 않았다.[144] 1929년 대공황이 프로젝트에 종지부를 찍었다.[144] 카일산트 남작이 회사를 장악한 이후로 그는 재정 상황이 개선될 때까지 RMSPC의 나머지 부분을 위해 회사 수익을 빼돌리고 있었다. 또한 회사가 발표한 배당금은 꾸준히 감소하여 해롤드 샌더슨이 경영진을 떠나게 만들었다.[145] 게다가 재무부의 반복적인 상환 요청은 카일산트를 약화시켰고, 결국 그는 1931년 로열 메일 사건과 관련하여 체포되었다.[146]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화이트 스타 라인은 지출을 제한했다. 가장 오래된 배들은 매각되었고, 승객 수 감소에 대응하기 위해 많은 항해가 취소되었다. 대서양 횡단 항로의 승객 수는 1928년 17만 2천 명이었지만, 다음 해에는 15만 7,930명으로 감소했다.[145] 새로운 여객선인 가 1930년에 취항했다. 이 배는 대서양 횡단 사우스햄프턴 항로의 여객선보다 속도가 느리고 따라서 수익성이 더 높았기 때문에 상황에 완벽하게 적응했다. 이 배는 즉시 회사에서 가장 많은 수익을 올리는 배가 되었고, 자매선인 가 1932년에 합류했다.[148]

그러나 1930년 회사는 사상 첫 적자를 기록했고, 이 적자는 그 이후 몇 년 동안 계속되었다.[149] 1931년 카일산트의 퇴출은 그의 사업 제국을 쇠퇴의 상태로 남겨두었다. 그 후 청산이 고려되었고, 은행들은 각 선대의 가치에 따라 여러 선단을 가능한 한 오래 유지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146] 1933년, 회사가 파산 직전에 이르자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던 커나드 라인(Cunard Line)과의 합병을 고려하기 위한 논의가 시작되었다.[151]

2. 9. 큐나드 라인과의 합병 (1934)

1933년, 화이트 스타 라인과 큐나드 라인은 모두 대공황으로 인한 심각한 재정난, 급감하는 승객 수, 그리고 노후화된 선단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1931년에는 큐나드 라인의 새로운 거대 여객선인 헐 534호(후일 퀸 메리)의 건조 작업이 비용 절감을 위해 중단되기도 했다.[153]

이러한 상황에서 1933년 영국 정부는 두 경쟁사에 지원을 제공하기로 합의했는데, 조건은 두 회사가 북대서양 항로 운영을 합병하는 것이었다.[153] 이 합의는 1933년 12월 30일에 완료되었고, 1934년 5월 10일에 커나드-화이트 스타 주식회사(Cunard-White Star Limited)가 설립되면서 합병이 이루어졌다. 화이트 스타 라인은 10척의 선박을, 큐나드 라인은 15척의 선박을 새로운 회사에 기여했다. 합병 당시, 헐 534호가 큐나드 라인의 선박이었기 때문에 회사의 62%는 큐나드 라인 주주들이 소유하고 38%는 화이트 스타 라인 채권자들이 소유하게 되었다.[154]

화이트 스타 라인의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노선은 합병에 포함되지 않았고, 1934년 후반에 쇼, 새빌 & 앨비온 라인(Shaw, Savill & Albion Line)에 별도로 매각되었다. 합병 1년 후인 1937년, 올림픽호는 운항에서 철수되어 해체되었다.[154]

1947년, 큐나드 라인은 커나드-화이트 스타 라인의 나머지 38% 지분을 인수했다.[151] 1949년 12월 31일, 큐나드 라인은 커나드-화이트 스타 라인의 자산과 운영권을 인수하고, 1950년 1월 1일부터 "큐나드 라인"이라는 이름으로 돌아갔다. 1934년 합병 이후, 두 회사의 선박에는 각 선박의 원 소유 회사의 깃발을 다른 깃발 위에 겹쳐서 게양했지만, 1950년부터는 마지막으로 남은 화이트 스타 라인의 여객선인 브리타니크[156]와 조지크[155]큐나드 라인의 회사기를 화이트 스타 라인의 기 위에 게양했다. 이들은 각각 1956년과 1961년에 운항에서 철수했다. 1950년 큐나드 라인의 아퀴타니아의 퇴역이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의 '떠다니는 궁전' 시대의 종말을 알린 것처럼, 10년 후 ''브리타니크''호의 퇴역은 화이트 스타 라인의 종말을 알렸다.[157]

모든 큐나드 라인 선박은 1968년 후반까지 큐나드 라인과 화이트 스타 라인의 회사기를 돛대에 게양했다. 이는 노매딕이 1968년 11월 4일까지 큐나드 라인에서 운항을 계속했고, 해체장으로 보내지기 전에 부유식 레스토랑으로 사용하기 위해 매입되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그 후 화이트 스타 라인의 깃발은 더 이상 게양되지 않았고, 화이트 스타 라인의 이름은 큐나드 라인 운영에서 제거되었으며, 화이트 스타 라인과 커나드-화이트 스타 라인의 모든 잔재는 사라졌다.[158][159]

3. 주요 선박

화이트 스타 라인의 주요 선박은 다음과 같다.

선박명진수 년도비고
오셔닉1870년
아틀란틱1871년
발틱1871년
리퍼블릭1871년
아드리아틱1872년
켈틱1872년
브리타닉1874년
게르마닉1875년
튜토닉1889년
마제스틱1890년
켈틱1901년20,904 GRT, 오셔닉급에서 따온 이름으로, 초기 설계는 길이가 약 207.26m로 오셔닉호보다 약간 짧았지만 너비는 약 22.86m로 더 넓었다. 2만 톤이 넘는 배수량으로 당시 가장 큰 배였다.[86]
아라빅1903년
아드리아틱1907년
올림픽1911년
타이타닉1912년
브리타닉1915년
마제스틱1922년
브리타닉1930년



화이트 스타 라인의 선박들은 전통적으로 접미사 "-ic"로 끝나는 이름을 사용했다.

3. 1. 오스트레일리아 항로

화이트 스타 라인은 1850년대 골드러시 기간 동안 호주와의 교역을 위한 노선으로 시작했지만, 1868년 회사가 붕괴되고 토마스 이즈메이에게 인수된 후 대서양 횡단 노선으로 재건되었다. 그러나 1890년대 후반, 서호주에서 추가적인 금광이 발견되어 또 다른 골드러시와 호주로 이주하는 사람들의 증가, 그리고 그 반대 방향으로 광물, 농산물, 양모, 고기의 무역 증가로 인해 호주 노선을 재개하기로 결정했다. 1880년대 후반 효과적인 기계식 냉장 시스템의 출현은 이미 이 노선에 있던 해운 회사들에게 주요 수익원이 되었는데, 이를 통해 대량의 소 송아지 사체를 영국 제도로 돌아오는 긴 항해 동안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160]

토마스 이즈메이는 1897년 리버풀, 케이프타운, 시드니 간 월간 서비스를 통해 호주 노선에 재진입하기로 결정했다. 테네리페는 왕복 항해 일정에 모두 포함되었다. 출항하는 배는 애들레이드멜버른에 기항했고, 귀환 항해는 플리머스에 기항한 후 리버풀에서 종착했다. 6주가 소요되는 항해였기 때문에 양방향 서비스를 유지하려면 5척의 배가 필요했다. 새로운 배에 대한 사양이 작성되었고 1897년 여름 할랜드 앤 울프에 주문이 이루어졌는데, 이는 빅토리아 여왕의 다이아몬드 주빌리와 일치하여 주빌리급으로 알려지게 되었다.[160]

대서양에서 속도보다 크기를 중시하는 화이트 스타 라인의 새로운 철학에 따라 주빌리급은 길이 약 167.64m에 거의 12,000 총톤으로 호주 노선에 투입된 가장 큰 배가 될 예정이었다. 이들은 단일 굴뚝, 쌍축 추진선으로, 화물/여객 혼합 선박으로 설계되었으며, 본질적으로 화이트 스타 라인의 초기 나로닉급의 확장 버전이었다.[161] 14kn의 서비스 속도를 가진 주빌리급은 오리엔트 라인과 P&O가 운영하는 소형 우편선보다 상당히 느렸으며, 그 크기 때문에 수에즈 운하를 통과할 수 없었으므로 남아프리카를 경유하는 긴 항로를 이용해야 했고 1등석 승객을 유치할 수 없었다. 대신 이들은 이민자/계절 노동자 수송을 목적으로 3등석 객실로만 320명의 승객을 수송했다. 그러나 화이트 스타 라인의 3등석 승객에 대한 기준 향상의 오랜 전통에 따라 이 시설들은 다른 노선의 동급 시설보다 상당히 앞서 있었고, 다른 선박의 2등석 시설과 거의 동등한 수준이었다. 같은 등급이었지만 주빌리급의 침대 가격은 다양하여 승객에게 프리미엄을 지불하고 2인실 또는 4인실 객실 또는 개방형 도미토리를 선택할 수 있었다. 승객들은 넓은 식당, 도서관, 흡연실과 같은 시설을 이용할 수 있었고 항해 중 거의 모든 갑판 공간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다. 이 배들은 7개의 화물칸에 15,000톤의 화물을 실을 수 있었는데, 여기에는 10만 마리의 고기 사체를 위한 용량도 포함되었다.[162]

첫 번째 주빌리급 선박인 는 1898년 11월에 진수되었지만, 1899년 2월 뉴욕으로의 첫 항해는 시험 항해였고 더 짧은 노선에서 새로운 선박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항해의 결과로 ''아프리카''호와 자매선에 약간의 개선이 이루어졌다.[160] 호주 노선은 실제로 두 번째 선박인 이 1899년 8월 리버풀을 출발하여 10월 시드니에 도착하면서 개통되었다.[162] 세 번째 선박인 는 1899년 12월 첫 항해를 시작했지만, 금속 가공 불량으로 인해 키가 부러진 후 케이프타운에서 몇 주 동안 지연되었다.

호주 노선을 위한 마지막 두 척의 선박은 최초 3척의 경험을 바탕으로 수정된 설계로 건조되었다. 호주 노선은 예상보다 승객들에게 더 인기가 많았기 때문에 이 두 척의 선박인 과 는 함교가 앞으로 이동하고 뒷갑판이 확장되었다.[160][161] 총톤수를 약간 증가시킨 것 외에도 이는 50명의 승객을 더 수용할 수 있게 하여 총 400명이 되었다. ''수에빅''호는 1901년 5월 첫 항해를 하고 화이트 스타 라인의 새로운 호주 노선을 완벽하게 완성했다. 이제 귀환 항해에는 런던 기항도 포함되었다. 대부분의 호주 승객은 기차로 최종 목적지로 가기 위해 플리머스에서 하선했고, 많은 화물은 런던으로 향했다. 그런 다음 배는 영국 해협을 통해 다시 항해하여 리버풀에서 나머지 화물과 승객을 하역한 후 다음 항해를 준비했다.

호주 노선은 화이트 스타 라인에게 성공적이고 수익성이 높았으며, 선박들에게는 대체로 사건 없이 순조로웠다. 노선 초기에는 처음 세 척의 배가 보어 전쟁 동안 남아프리카로 병사, 군인, 물자를 수송하는 데 집중적으로 사용되었지만, ''수에빅''호는 1907년 콘월주 리자드 포인트 앞바다에서 좌초되었다. 사상자는 없었고, 야심찬 인양 작업의 일환으로 배가 두 동강 난 것에도 불구하고 수리되어 1908년 1월 다시 운항을 시작했다.[161] 화물 수송의 성공으로 화이트 스타 라인은 주빌리급과 비슷한 크기의 기존 화물선인 를 뉴욕 노선에서 호주 노선으로 전환시켰다. 1910년 ''세빅''호는 수에즈 운하를 통해 호주로 항해하는 실험에 사용되었지만 운하에서 여러 차례 좌초되었고, 배들은 계속해서 케이프를 경유하여 운항했다. ''세빅''호는 계절에 따라 호주 가을(2월~4월) 말에 주로 소와 양모를 운송하고 대서양 여름에는 뉴욕 노선으로 전환되는 방식으로 호주 노선에 사용되었다.

추가 승객 수용 능력에 대한 지속적인 수요로 인해 화이트 스타 라인은 이 노선을 위해 단독 선박을 건조했다. 1913년에 진수된 는 길이 약 199.64m에 18,495 총톤으로 주빌리급의 더 크고 정교한 발전형이었다. 과 급과 마찬가지로 ''세라믹''호는 3축 추진선[163]이었으며, 중앙 프로펠러는 두 개의 왕복 동력 증기 기관의 배기가스를 사용하는 저압 터빈으로 구동되었다. 이를 통해 추가 크기임에도 불구하고 석탄 소비량이 최소한으로 증가하면서 주빌리급 선박보다 약간 빠른 16kn의 속도를 낼 수 있었다. 새로운 선박은 훨씬 더 큰 상부 구조와 주빌리급 선박의 거의 두 배에 달하는 승객 수용 능력(총 600명)[163]을 가지고 있었는데, 여전히 광고된 대로 3등석 객실로만 운송되었다. 또한 8개의 화물칸에 19,000톤의 화물을 실을 수 있었고, 그중 약 9089.71L3은 냉장 공간이었다.[164] ''세라믹''호의 크기는 런던의 틸버리 항구 부두의 길이와 당시 계획 중이던 시드니 하버 브리지 아래 마스트 간격에 의해 제한되었다. 1914년 9월 시드니에 도착했을 때, 영국에서 호주 노선을 운항하는 가장 큰 선박으로 주빌리급 선박을 대체했다. 1932년 하버 브리지의 오랜 지연 끝에 건설된 후 ''세라믹''호는 당시 운항 중인 선박 중 가장 키가 큰 선박이 되어 그 아래를 통과했다.[164]

7척의 배는 모두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수송선으로 징용되어 화이트 스타 라인은 정기적인 호주 노선을 중단해야 했다. ''아프리카''호는 1917년 영국 해협에서 U-보트에 의해 격침되었고,[165] ''세빅''호는 전쟁 후 영국왕립보조함대의 소유로 남았지만 나머지 5척의 배는 화이트 스타 라인으로 반환되었고 1919년에 서비스가 재개되었다. 나머지 주빌리급 여객선은 1920년대 후반에 운항에서 철수되었다. ''퍼식''호는 1926년에 해체되었고, ''메딕''호와 ''수에빅''호는 1928년에, ''루닉''호는 1929년에 매각되었다. 모두 크기와 화물 수용 능력 때문에 포경 공장선으로 개조되었다.

호주 노선은 전쟁 전만큼 수익성이 높거나 교통량이 많지 않았고, 특히 1927년 로열 메일 스팀 패킷 컴퍼니의 소유가 된 후에는 더 이상 화이트 스타 라인의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주빌리급을 대체할 새로운 급의 첫 번째 선박으로 계획된 새로운 선박인 가 1917년에 진수되었다. 이는 터빈으로만 구동되는 최초의 화이트 스타 라인 선박이었으며, 약 140.21m에 9,332 총톤으로 이전 선박보다 작았지만, 이민자/화물 운송 역할은 이전 선박과 같았다. ''베딕''호는 건조업체에서 바로 수송선으로 서비스를 시작하여 1925년 호주 노선에 배치될 때까지 화이트 스타 라인의 캐나다 노선에 사용되었다. ''세라믹''호와 ''베딕''호는 화이트 스타 라인이 1934년 커나드 라인과 합병될 때까지 덜 집중적인 호주 서비스를 유지했다. 새로운 경영진은 즉시 화이트 스타 라인의 남반구 노선을 종료하기로 결정했고, ''세라믹''호는 같은 노선을 계속 운영한 쇼, 사빌 & 알비온 라인에 매각되었으며, ''베딕''호는 해체되었다.

3. 2. 뉴질랜드 항로

1882년 (Shaw, Savill & Albion Line)이 설립되었고, 뉴질랜드로 향하는 항로를 개설하기로 결정했지만 경험이 부족했다. 따라서 화이트 스타 라인은 공동 서비스를 제공할 것을 제안했고, 1884년 화이트 스타 라인이 제공한 콥틱(Coptic) 호, 도릭(Doric) 호, 아이오닉(Ionic) 호와 쇼, 사빌 앤 알비온 라인이 제공한 ''아라와(Arawa)''호, ''타이누이(Tainui)''호로 서비스가 시작되었다. 선박들은 외항 여정에서는 호주에 기항하고, 귀항 여정에서는 파나마 운하를 통과했다.[52] 1902년부터 이 공동 서비스는 애시닉(Athenic) 호, 코린티크(Corinthic) 호, 두 번째 아이오닉(Ionic) 호가 도입되면서 선박들이 교체되었고, 이 선박들은 1930년대까지 운항되었다.[53] 화이트 스타 라인이 사라진 후에도 두 회사 간의 관계는 지속되었으며, 쇼 사빌 앤 알비온 라인은 화이트 스타 라인의 명명법을 계속 사용하여 선박 이름을 '-ic'으로 끝나게 했다.[54]

4. 유산

2012년 촬영된 화이트 스타 라인의 마지막 남은 배, 노매딕.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에서 1912년 당시 모습으로 복원되어 건조장에 정박해 있다.


화이트 스타 라인의 본사였던 리버풀의 알비온 하우스(알비온 하우스)는 제임스 스트리트에 아직도 남아 있으며, 경쟁사인 큐나드 라인의 웅장한 본사가 보이는 곳에 위치해 있다. 건물에는 화이트 스타 라인의 본사였음을 기념하는 명판이 있다. 이 건물은 리버풀 최초의 오픈 플랜 사무실 건물이었다. J. 브루스 이즈메이는 이 건물에 사무실을 두었다.

화이트 스타 라인의 런던 사무실 건물인 오세아닉 하우스(Oceanic House)는 오늘날에도 존재하며 아파트로 개조되었다.[167] 트라팔가 광장에서 멀지 않은 칵스퍼 스트리트에 위치하며, 건물 입구 위에는 여전히 회사 이름을 볼 수 있다. 사우샘프턴의 캐뉴트 로드에 있던 사무실은 현재 캐뉴트 챔버스로 알려져 있으며, 여전히 존재한다.[168]

화이트 스타 라인의 마지막 남은 선박인 프랑스 여객 수송선 ''노매딕''은 2006년 1월 북아일랜드 사회개발부에 의해 매입되었다. 이후 벨파스트로 돌아와 원래 건조사인 할랜드 앤 울프의 도움을 받아 노매딕 보존협회의 주관 하에 1912년 당시의 우아한 모습으로 완전히 복원되었다. 현재는 대서양 증기선, 화이트 스타 라인, 그리고 그들의 가장 유명한 배인 타이타닉의 역사를 다룬 타이타닉 벨파스트 박물관의 야외 전시물로 사용되고 있다. 역사적인 ''노매딕''은 2013년 5월 31일 공식적으로 공개되었다.[169][170]

1995년, 큐나드 라인은 회사가 기대하는 높은 수준의 고객 서비스를 참고하여 퀸 엘리자베스 2호에 "화이트 스타 서비스"를 도입했다. 이 용어는 오늘날에도 퀸 메리 2호, 퀸 빅토리아호, 퀸 엘리자베스호에 사용되고 있다.[171] 큐나드 라인은 또한 큐나드 라인 선박에서 기대되는 서비스 수준을 준비하는 사내 프로그램인 화이트 스타 아카데미를 설립했다.[171]

타이타닉 침몰 사고를 기리기 위해 매년 4월 15일 모든 큐나드 라인 선박과 ''노매딕''에는 화이트 스타 깃발이 게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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